신선 호남대 초빙교수(68년생)는 올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예술의 본고장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는 것은 화가로써 무한한 영광이기 때문에 작품을 그리는 데 심혈을 쏟고 있다.
풍암동에 위치한 신선 아뜨리에
조만간 퇴직하면 신 교수는 자신의 고향인 완도 고금면에 갤러리를 짓고 연로한 부모님을 봉양하면서 노후를 보내는 것이 꿈이다. 지금 세상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낙향하는 꿈에 대해 어떤 이들은 선뜻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신 교수는 이미 화랑을 지을 땅을 구입해놓고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했다. 갤러리에서 고향의 학생들을 위해 그림을 지도하고 재능기부하며 부모 형제자매들이 한곳에 모여서 ‘가족촌’을 꾸미는 것이 그의 오랜 소망이다.
신 교수의 지론은 부모님이 시키면 무조건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끔찍이 아끼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치관이다. 인륜지대사인 결혼도 부모님이 주선한 고향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어머니는 유달리 신 교수에게 내조 교육을 엄하게 가르쳤다. 이러한 부모 훈육 때문에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강인한 정신력을 갖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30년 이상 일주일에 한 번씩 친정집을 찾아간다. 항상 부모님에게 먹을 것을 가득 챙겨, 마을에 사는 어르신들에게도 나눠준다. 주위에서는 효부상을 수상한 어머님의 본을 받은 효녀라고 칭송이 자자하다. 게다가 신 교수가 번 돈의 절반은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위해 쓰고 있다고 말했다.
결혼생활만큼은 순탄하지 않았다. 광주로 이사를 온 뒤 전세 사기 사건에 휘말려 재산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남편이 부도를 내면서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신 교수는 남편에게 기죽지 말라고 “부부 중 한 사람만이라도 돈을 벌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다소곳한 내성적이었던 그녀의 성격도 먹고살기 위해서 다부진 모습으로 변했다.
신혼 초기 완도에서 학생들을 그룹 과외했던 경험을 살려 1993년 광주광역시 동구에서 아세아보습학원을 차렸다. 학생들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면서 200명 되는 학원생을 유지하는 등 사업의 수완을 발휘했다.
학원 운영의 비법은 ‘대화’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학원생들에게 사랑의 매를 들지 않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나눴다. 즉, “사람은 대화를 풀면 모든 것을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예절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신 선 교수
또 하나의 비법은 ‘보살핌’이다. 맞벌이 부부가 많은 탓에 아이들이 끼니를 거르곤 했다. 학원 입구에 매일 먹거리를 챙겼다.
셋째의 비법은 당시에 왕따 문제가 학교는 물론 지역 사회에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었을 때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데 앞장을 섰다. 7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배웠던 예절과 행동거지, 생활습관 등을 연계해 예절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
우선 ‘듣기 좋은 별명 만들어 주기 운동’에 앞장섰다. 이름과 별명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왕따 없는 교우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애정 표현이 적극적이어서 가족 간의 생활이 즐거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예절 강의를 하면서 왕따 없는 학교 만들기를 주도한 덕에 공중파 TV에 소개되기도 했다.
예절 강사 외에도 학생 상담 및 독거노인 보살핌 등 다양한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소년원의 재범을 막기 위해 갱생보호공단에서도 봉사했다.
신 교수는 학원을 운영하다 보면 항상 밤늦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손 편지 쓰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가졌다. 대화가 부족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녀들의 필통 안에 ‘항상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도록 간단한 내용의 메시지를 남겼다.
방 한켠에 36년 세월이 녹아있는 자료들
또한 아이들의 가방을 매일 챙겨주고, 한 달에 한 번씩 학교에 손 편지를 써 자녀들의 사기를 북돋아 줬다. 지금도 신 교수 방 한켠에는 그때 주고받은 손편지와 엽서, 카드 등이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다.
방 한켠에 빼곡한 기록들
자녀 교육을 위해 메모와 스크랩, 사진을 모아든 것이 자신의 보물 1호라고 밝혔다. 아무리 피곤해도 해야 할 일은 정리와 기록, 정리 정돈하고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했다.
신 교수는 광주광역시학원총연합회 논술보습분과에서 회장으로 추대 받아 9년간 봉직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가장 역점을 뒀던 사업이 ‘교육감상 남발 정상화’였다. 당시 수상 과정에는 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상자를 배출한 학원에는 학생이 몰리고, 수학경시대회에서 상을 받는 원생을 배출하느냐 여부에 따라 학원 운영 40%를 좌우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의 성적을 장난치지 말라며 회장으로서 1인 시위를 했다. 탄원서도 여섯 차례 제출하고, 교육청에 찾아갔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수학경시대회 교육감상 남발 문제를 막았다.
신 교수는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점을 개선하면서 광주 동구 반부패운동본부회장을 맡았다. 또한 광주전남어머니기자단 회장도 활동했다. 이처럼 봉사 및 정의로운 활동이 소문이 나면서 평판이 좋았던 탓에 주위에서 동구 국회의원 출마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그는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신 교수가 정치인으로 변신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미술의 끈을 놓지 않고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글로벌비즈뉴스(클릭)
신선 호남대 초빙교수(68년생)는 올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예술의 본고장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는 것은 화가로써 무한한 영광이기 때문에 작품을 그리는 데 심혈을 쏟고 있다.
풍암동에 위치한 신선 아뜨리에
조만간 퇴직하면 신 교수는 자신의 고향인 완도 고금면에 갤러리를 짓고 연로한 부모님을 봉양하면서 노후를 보내는 것이 꿈이다. 지금 세상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낙향하는 꿈에 대해 어떤 이들은 선뜻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신 교수는 이미 화랑을 지을 땅을 구입해놓고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했다. 갤러리에서 고향의 학생들을 위해 그림을 지도하고 재능기부하며 부모 형제자매들이 한곳에 모여서 ‘가족촌’을 꾸미는 것이 그의 오랜 소망이다.
신 교수의 지론은 부모님이 시키면 무조건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끔찍이 아끼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치관이다. 인륜지대사인 결혼도 부모님이 주선한 고향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어머니는 유달리 신 교수에게 내조 교육을 엄하게 가르쳤다. 이러한 부모 훈육 때문에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강인한 정신력을 갖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30년 이상 일주일에 한 번씩 친정집을 찾아간다. 항상 부모님에게 먹을 것을 가득 챙겨, 마을에 사는 어르신들에게도 나눠준다. 주위에서는 효부상을 수상한 어머님의 본을 받은 효녀라고 칭송이 자자하다. 게다가 신 교수가 번 돈의 절반은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위해 쓰고 있다고 말했다.
결혼생활만큼은 순탄하지 않았다. 광주로 이사를 온 뒤 전세 사기 사건에 휘말려 재산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남편이 부도를 내면서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신 교수는 남편에게 기죽지 말라고 “부부 중 한 사람만이라도 돈을 벌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다소곳한 내성적이었던 그녀의 성격도 먹고살기 위해서 다부진 모습으로 변했다.
신혼 초기 완도에서 학생들을 그룹 과외했던 경험을 살려 1993년 광주광역시 동구에서 아세아보습학원을 차렸다. 학생들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면서 200명 되는 학원생을 유지하는 등 사업의 수완을 발휘했다.
학원 운영의 비법은 ‘대화’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학원생들에게 사랑의 매를 들지 않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나눴다. 즉, “사람은 대화를 풀면 모든 것을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예절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신 선 교수
또 하나의 비법은 ‘보살핌’이다. 맞벌이 부부가 많은 탓에 아이들이 끼니를 거르곤 했다. 학원 입구에 매일 먹거리를 챙겼다.
셋째의 비법은 당시에 왕따 문제가 학교는 물론 지역 사회에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었을 때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데 앞장을 섰다. 7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배웠던 예절과 행동거지, 생활습관 등을 연계해 예절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
우선 ‘듣기 좋은 별명 만들어 주기 운동’에 앞장섰다. 이름과 별명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왕따 없는 교우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애정 표현이 적극적이어서 가족 간의 생활이 즐거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예절 강의를 하면서 왕따 없는 학교 만들기를 주도한 덕에 공중파 TV에 소개되기도 했다.
예절 강사 외에도 학생 상담 및 독거노인 보살핌 등 다양한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소년원의 재범을 막기 위해 갱생보호공단에서도 봉사했다.
신 교수는 학원을 운영하다 보면 항상 밤늦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손 편지 쓰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가졌다. 대화가 부족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녀들의 필통 안에 ‘항상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도록 간단한 내용의 메시지를 남겼다.
방 한켠에 36년 세월이 녹아있는 자료들
또한 아이들의 가방을 매일 챙겨주고, 한 달에 한 번씩 학교에 손 편지를 써 자녀들의 사기를 북돋아 줬다. 지금도 신 교수 방 한켠에는 그때 주고받은 손편지와 엽서, 카드 등이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다.
방 한켠에 빼곡한 기록들
자녀 교육을 위해 메모와 스크랩, 사진을 모아든 것이 자신의 보물 1호라고 밝혔다. 아무리 피곤해도 해야 할 일은 정리와 기록, 정리 정돈하고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했다.
신 교수는 광주광역시학원총연합회 논술보습분과에서 회장으로 추대 받아 9년간 봉직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가장 역점을 뒀던 사업이 ‘교육감상 남발 정상화’였다. 당시 수상 과정에는 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상자를 배출한 학원에는 학생이 몰리고, 수학경시대회에서 상을 받는 원생을 배출하느냐 여부에 따라 학원 운영 40%를 좌우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의 성적을 장난치지 말라며 회장으로서 1인 시위를 했다. 탄원서도 여섯 차례 제출하고, 교육청에 찾아갔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수학경시대회 교육감상 남발 문제를 막았다.
신 교수는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점을 개선하면서 광주 동구 반부패운동본부회장을 맡았다. 또한 광주전남어머니기자단 회장도 활동했다. 이처럼 봉사 및 정의로운 활동이 소문이 나면서 평판이 좋았던 탓에 주위에서 동구 국회의원 출마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그는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신 교수가 정치인으로 변신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미술의 끈을 놓지 않고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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